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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추워졌다. 영하권으로 떨어진 건 아니지만 체감상 한겨울이 찾아온 것만 같다. 반바지에 반팔로 밖을 나서려던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긴바지에 두툼한 외투를 꺼내입었다. 날씨를 보아하니 간절기에 입으려고 사놓았던 트렌치 코트는 올해도 못입을 것 같다. 이젠 그야말로 가을은 없고 늦여름과 초겨울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반팔로 5달을 버티다 '지금이야'를 외치며 트렌치 코트를 한달 입고, 다시 5달을 롱패딩으로 버티다 '지금이야'를 외치며 한달짜리 봄원피스를 입는 짤이 밈처럼 돌아다닌다. 이런 계절때문에 한국이 패션 후진국이라는 얘기도 돈다. 입을만한 옷은 죄다 간절기 옷이란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날씨때문에 멋을 낼 수가 없다는 건 앞뒤가 안맞는 얘기다. 날씨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거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들이 살며 문화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발전하는게 패션아닌가? 고대 이집트는 사시사철이 건조하고 더운 날씨였기에 옷 자체를 화려하게 입기 힘들었다. 그래서 발달한게 온갖 호화보배로 이루어진 장신구들이다. 날씨가 어떻든 계절이 어떻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취향에 맞는 무언가를 찾아내고 남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애쓴다. 자연스러운 문화 형성이란 이런 거다.
늘 덥고 건조했던 고대 이집트에선 옷으로 계급적 차별화를 두기 힘들었다. 때문에 발달한 것이 온갖 종류의 장신구들이다. 이렇듯 기후에 맞춰 어떻게든 발전하는 것이 '취향'과 '구별짓기'의 욕망이고 이 욕망을 근거로 자연스럽게 형성해 온 것이 패션의 역사다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이런 앞뒤 안맞는 계절 한탄이 나온 건 패션의 트렌드가 우리와는 기후가 많이 다른 나라들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자주 못입어서 아쉬운 옷 1위일 것만 같은 트렌치 코트도 영국 기후에 맞춰 탄생된 독특한 옷이다. 원래는 진흙투성이 참호(트렌치)에서 굴러다녀도 몸이 젖지 않도록 하게 만든 방수 코트였지만 영국 날씨에 찰떡같이 맞아들어가는 옷이었기 때문에 국민 코트로 자리매김했다. 영국은 한여름에도 해가 조금만 지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더운 날이 거의 없다. 게다가 맑은 날에도 하루에 몇번씩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괴상한 날씨 덕에 우산 아니면 방수 자켓을 꼭 갖고 다녀야 한다. 캐쥬얼하게는 후드달린 고어텍스 자켓이 딱이겠지만 양복쟁이 직장인에겐 트렌치 코트가 생필품이나 마찬가지다. 한겨울 2달 정도를 제외하면 1년 내내 입을 수 있다. 이런 날씨를 가진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스쿨 중 하나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이 있는 곳이고 그만큼 많은 유력 패션 인사들이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자연히 런던에서 발표되는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트렌드를 움직이는 한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고 이들은 꼭 트렌치 코트를 활용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따라서 트렌치 코트는 한번도 트렌드의 변방으로 내려온 적이 없다.
파리지앵처럼 우아하게 트렌치를 입고 싶어 거금을 주고 사지만 한국에서 입을 수 있는 날은 거의 없다 영국 말고 다른 나라는 어떤가. 패션의 대표 도시인 파리 역시 한여름인 7, 8월의 평균 최고기온이 24도 정도로 약간 더운 봄, 가을 날씨가 쭉 지속된다 해도 무방하다. 한겨울인 1월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밀라노도 한국처럼 후덥지근하게 덥거나 칼로 베는 듯한 추위는 없다. 아시아의 패션 강국 일본 도쿄의 날씨는 여름에 살인적으로 덥긴 하지만 겨울은 크게 춥지 않다. 즉 패션으로 유명한 도시는 대부분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간절기 옷들이 가장 많이 팔릴 수 밖에 없는 기후이고 이에 걸맞는 아이템들을 중심으로 디자인이 발전되고 트렌드가 형성된다.
이런 메가 트렌드를 중심으로 베끼기도 하고 적당히 변형도 줘가면서 중저가 브랜드의 제품들이 나오는 건데 이러니 이뻐보이는 옷들은 죄다 한국에선 쓸모가 없다. 그나마 2010년대로 넘어가면서 럭셔리 브랜드의 타겟이 글로벌화 되고 중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취향을 조금 더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반팔 티셔츠, 한파용 다운 파카 등이 트렌드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다수의 디자인은 간절기에 특화되어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패션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2달도 안되는 간절기가 왔다 싶으면 비싸게 샀던 얇은 외투를 꺼내며 다급히 외칠 수 밖에 없다.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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