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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는 언제부터 패셔너블해졌나CRITIQUE 2021. 10. 14. 14:26
발렌시아가가 포트나이트와 콜라보를 진행했다. 포트나이트 로고가 박힌 후드나 티셔츠(포트나이트 굿즈랑 다를 거 없어보이지만 가격은 50만원 이상인)도 판매하지만 중요한 건 게임 내 스킨으로 발렌시아가의 신상 컬렉션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사실 올해 초부터 메타버스란 이름의 실체없는 광풍 덕에 온갖 브랜드가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에 이름 한번 걸겠다고 달려들었고 구찌 역시 그 가상 세계 안에 매장을 내고 옷, 가방 등을 판매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흐름에서 봤을 때 발렌시아가의 이번 콜라보 역시 파격적이거나 신선하다고는 못하겠다. 세상이 너무 빠르다.
012345012물리적 현실을 벗어난 가상 현실 속에서 옷과 신발만을 판매할 필요는 없다. 메타버스가 워낙 난리니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 브랜드 입장에선 거기에 명함이라도 걸치고 앞날을 위한 포석을 까는 건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행보에 위화감은 없다. 의아한 건 오히려 게이머들이다. 이들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패셔너블해 진건가?
불과 몇년전, 아니 지금도 사실 게임하는 사람들은 일상 세계와는 단절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패션이란 역사적으로 언제나 사교 문화의 부산물이었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 교류하는 '인싸'들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게임은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교류를 한다해도 게임 내에서 경쟁을 하든 친목을 쌓든 하는 정도지 직접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게임을 오래하는 헤비 유저일 수록 옷차림에 별 관심이 없고 트렌드나 브랜드 등에도 별 지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012345678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린 상징적인 사건이 코로나 사태 때 터지는 데 바로 '동물의 숲'이다. 닌텐도의 '동물의 숲'은 결코 최근에 나온 게임이 아니다. 무려 2001년에 첫 작품이 발매된 유서깊은 게임으로 초기작부터 지금의 시스템과 별반 차이는 없다. 다만 최근작에 들어서는 인터넷 기능을 적극 도입한 닌텐도 스위치 기기 덕분에 유사 SNS의 역할을 하는 '친구 초대하기' 시스템이 생겨났고, 옷이나 건물 등을 디자인할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인 '마이 디자인'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 두가지 시스템은 닌텐도조차 예상하지 못한 희귀한 광경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게이머들 스스로 현실의 패션 브랜드 로고나 실제 디자인 등을 적극 활용해 옷을 만들고 매장을 꾸미는 등의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에 패션계도, 게임계도 놀랐는데 왜냐면 '게이머'가 패션에 대해 이정도로 관심이 많을 줄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게임 내 아이템 판매가 엄청난 시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국 MMORPG의 전설(이자 수치), '리니지' 게임 내에서 핵과금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캐릭터의 성능을 조금 더 올리기 위해 거의 수천, 수억을 쏟아붓는다. 도박 게임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긴 하지만 환금성이라곤 전혀 없다. 마치 슈퍼카나 파텍필립같은 시계를 사는 것처럼 그런 과금을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단 하나, 게임 내 유저들 사이에서 우월한 지위와 명성을 갖기 위해서다. 명품 회사들의 판매 전략 메커니즘과 거의 동일한 과금 구조고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기업들도 럭셔리 브랜드들이지만 이들은 지금까지 게임 쪽으로 진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게이머들은 패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물의 숲에 등장한 온갖 브랜드 로고와 현실 트렌드와도 부합하는 디자인들의 등장은 패션계를 각성시켰고 곧바로 마크 제이콥스, 발렌티노 등의 브랜드는 자사의 디자인을 게임 내에 오피셜로 등장시키며 신상 컬렉션마저 게임 내에서 발표하기에 이른다. 물론 코로나 시국을 맞이하여 현실의 패션위크가 모두 열리지 않은 상황도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야 하는 패션계의 눈물겨운 노력 정도로 볼 수 있겠지만 게이머를 대하는 패션계의 인식이 획기적으로 달라졌음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브랜드 운영의 결정권을 쥔 세대들이 볼 때 언제 이렇게 세상이 급변했나 싶겠지만 이미 게임은 MZ세대에게 있어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스며든 문화였다. 그리고 특정 게임 콘솔이나 고사양의 컴퓨터를 소유하지 않으면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던 시절과는 달리 고성능 스마트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부터 게임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근가능한 가장 대중적인 놀이 문화가 되었다. 따라서 패션에 관심이 많고 대면 사교 활동에도 활발한 사람들 역시 게임을 가볍게라도 즐기게 되었고 이런 이들이 게임 내 커뮤니티에 유입되면서 유명 패션 브랜드나 트렌드 등은 기초 상식으로서 통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SNS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우월함을 뽐내며 구별짓기를 하는 세대에게 있어 사람을 실제로 만나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친구 만나서 어렵게 당첨된 트레비스 스캇 프라그먼트 콜라보 조던을 발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것보다 SNS에 사진 올리고 '이게 되네?' 같은 쿨한 멘트 적어서 좋아요 받는게 더 효율적이다. 이렇게 밖을 나가지 않고도 불특정 다수에게 자랑질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자 방안 구석 겜돌이, 겜순이들도 자랑질의 도구인 패션 브랜드에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19세기처럼 무도회에서 사람을 만난다면 꾸뛰르 드레스가 필요하고, 20세기의 클럽에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튀는 옷과 신발 등이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사진찍어 올리는게 전부인 사람들에게 자랑질의 도구가 굳이 옷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무심한듯 시크하게 책상 위 슈프림 스피커 등을 찍어 올리는게 낫지 않겠나? 이런 트렌드를 반영하듯 구찌같이 발빠른 럭셔리 브랜드는 가구, 소품 컬렉션을 크게 확대하는 중이다.
타이거 자수 장식의 무아레 암체어 - ₩ 10,000,000 (구찌코리아 공식 사이트 기준) 012BLEACH CHECK CUP AND PLATE (Acne Studio) 근본이 옷과 가방인 럭셔리 브랜드들이 이래도 되냐고? 어차피 럭셔리 브랜드의 고전적 정체성은 발렌시아가의 트리플 S가 대히트를 치며 깨져버린 지 오래다. 수제작의 유구한 전통, 만듦새에 대한 지독한 고집으로 명품의 기준을 가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라는 거다. 뭘 만들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는 비쥬얼 내러티브로 옮겨갔다. 그렇다면 구조적 꾸뛰르 드레스로 명성을 날렸던 발렌시아가에서 고기능성 트레킹 운동화를 만들든 여행가방으로 유명했던 구찌가 킹받는 표정의 호랑이 문양 의자를 만들든 상관없는 거다. 어차피 SNS 위에선 만져지지도 않는 2D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차례는? 실물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단계로 진입하는 게 자연스러운 행보다. 그리고 그 판을 이미 일찍부터 체계적으로 깔아놓은 곳은 단연 게임계다.
신작 게임 현질에 일단 40만원 정도 지르고 시작하며, 좋은 아이템과 캐릭터를 뽑기 위해서라면 몇백, 몇천만원도 아깝지 않은 게이머들과 현실의 패션 트렌드가 결합된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시너지를 낼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게임 내에서 발휘되는 성능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지만 캐릭터의 성능을 올리고 싶어하는 본질적인 이유 역시 게임내 파티원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장의 상당 부분을 패션계가 가져가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제 게임 혹은 메타버스 플랫폼이 패션의 새로운 블루오션이란 건 명백한 기정 사실이 되었다. 지금은 보다 먼 미래를 예상하고 앞으로 직면할 문제들을 고민해야 할 때다. 물리적 현실을 벗어난 이들에게 패션이란 과연 옷이나 가방, 가구 정도에 한정될까? 어차피 다 같은 3D 폴리곤 덩어리들일 뿐인데 기왕 사는거 슈퍼카, 럭셔리 맨션, 초호화 요트, 아니 우주선, 우주전함같은걸 사고싶지 않을까? 현실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온갖 매력넘치는 디자인의 슈퍼 로봇도 구매욕을 자극할 거다. 뭔가 물리적인 것만 팔 필요도 없다. 캐릭터가 취하는 특정 모션이나 표정, 행동도 브랜드를 찍어서 파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아니 그냥 이쁘고 잘생긴 캐릭터 자체가 제일 잘팔릴 것도 같다. 그렇다면 발렌시아가, 구찌는 이제 사람(혹은 동물 혹은 외계인 혹은 생물 혹은 무생물) 그 자체를 디자인하는 브랜드가 되는걸까?
상상은 무한대고 고민할 거리는 무진장있다. 이런 엉망진창인 미래가 두근두근한 사람만이 그 미래를 쟁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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